Serapeum의/생각

역사 이야기 - 광해군과 인조의 외교와 대동법

serapeum 2010. 8. 9. 07:30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그냥 보고 있으면, 조선 15대왕 광해군과 16대왕 인조가 살짝 떠오릅니다.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과  계속 쪼그라들던 명,  임진/정유왜란 이후  쌈질 좀 한다는 것들이 몽땅 사라진 왜를  모두 아우르는 말 그대로 능수능란한 실용 등거리 자주 외교를 구사한 광해군을 패위 시킨, 인조 반정세력은 반정의 명분인 명나라를 숭상하는 향명배금(向明排金)-사대외교만을 고집하다  결국 청을 자극하여 정묘/병자호란을 만들고 맙니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던 조선은 광해군 때의 재건으로 어느 정도 회복의 기운을 보이다가  그냥 다시  쑥대밭이 돼버리고 맙니다. 물론 인조 자신은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례(降禮)를 청 태종에게 하며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고, 조선을 청에게 바치고, 청의 속국이 되어버렸지요. 거기에 더해 인조는 자신의 두 아들,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볼모로 청국에 보내고 십여년 후 귀국한 첫째 아들부부는 죽음에 이르게까지 합니다.

 

당시 인조 반정세력이 광해군을 패위 시킨 이유는  이런저런 기록으로 남아있는데요.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킨 대표적인 이유로는 영창대군의 사사와 인목대비의 폐위 입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를 위한 견제세력들의 제거가 그 이유였습니다. 이 부분은 성리학을 근간으로한 조선사회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전 임금들의 정치적 행위를 보면  광해군의 행위가 그리 중하다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광해군은 신하들에게 있어 그리 존중받는 임금이 아니였던 듯  합니다. 실제로 나라를 통치하는 능력과는 상관없는 출신문제가  항상 그를 힘들게 했습니다. 정빈의 아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서출의 장자도 아닌 둘째인 그가 세자로 책봉 되는 과정도 그렇고 책봉된 이후에도  주변의 무시와 불인정은 꾸준히 그를 괴롭혔을 겁니다.

 

세자 책봉 조차 선조의 거부로 계속 미루어지다가 임진왜란으로 한양을 버리고 도망을 가는 어수선한 와중에 평양에 가서야  어쩔 수 없이 후계자를 지명해야되는 절박한 순간에 이루어졌으니까요.  명나라 역시 그의 세자 책봉을 장자가 아니라하여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광해군은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인정 받지 못하고 위협 받는 위치에서 계속 자신의 능력을 보여줘야 했습니다. 그것 만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반정세력이 강하게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민심이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인조 때 민란이 더 많았다는 기록을 봐서는 그리 믿을만한 주장이 아닌 듯 합니다. )   

 

물론, 이와 같은 반정 이유들은 그냥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 했을 겁니다. 그와 같은 왕의 왕권 확립을 위한 통치행위는 광해군 시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무엇이 서인들을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역모를 이끌었을까요..? 임진왜란 이후의 광해군의 통치행위는 여러 사료와 평가들를 보면, 긍정적인 반응 일색일 정도로 좋기만 했는데 말입니다..?

 

여기서 저는 광해군 때 시작된 대동법을 주목해 봅니다.

 

대동법은  조선조 국세의 하나인 공납을 현물이 아닌 쌀로 거두게 한 것입니다. 그럼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현물로 거두는 공납제도를 현물이 아닌 쌀로 거두는 대동법으로의 세제 개편이 왜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키는 이유가 되었을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대동법의 시행이 땅을 많이 소유한 양반들의 세금 부담이 크게 높인겁니다.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는, 조선의 통치 세력이었던 양반들은 이 법에 극도의 반감을 갖게 됩니다. 당연히 그들은 무엇이든 해야 했겠죠.

 

공납이란, 평민들이 해당 각지의 토산물을 나라에 바치는 것을 말하는데 각종 수공품과 농수산물등을  나라에 바치도록한 것이였습니다. 평민들이 그 토산물을 만들거나 구해서 왕실과 관청에 직접 바쳐야 했었는데요. 여기서 엄청난 패단이 발생합니다. 관청의 관리들과  물건을 만들어내는 상공인, 그 물건을 유통시키는 중간 상인들이 방납을 이용하여 힘없는 평민들을 등쳐 먹기 시작한 겁니다.

 

방납이란, 평민들이 자신들의 노역이 들어간  공납 물품 대신에 쌀이나 옷감을 관청에 지불하면, 해당 관청은 한양이나 지방의 제조업자나 상인들에게 해당 물품을 구입하여 중앙에 보내는 방식입니다.

  

방납이 일반화 되면서 관리들과 상공인들은 공납물품의 가격을 터무니 없이 높게 부르고, 평민들이 직접 구해온 공납물품은 받아들이지 않는  수법 등으로 엄청난 중간 이윤을 챙기게 됩니다. 당연히 수많은 농민들은  그 엄청난 부담에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임진왜란에 즈음에서는, 지역에 따라서는 도저히 공납을  지탱할 농민들이 남아있지 않은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임진/정유왜란으로 엉망이 된 나라를 복구하기 위한 방책에 골몰하던 광해군은 일부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서 대동법을 시행하기로 합니다. 대동법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라가 공납을 현물이 아닌 쌀로 받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공납을 현물이 아닌 쌀로 직접 받아서, 시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직접 구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동법의 시행은 방납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게 됩니다. 방납을 나라에서 직접 시행하게 됨으로인해 그 동안 땅 짚고 헤엄치던 부패한 관리들과 방납 상인들은 손가락을 빠는 상황에 놓이게 되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그 동안 공납의 의무와는 거리가 멀었던 양반들의 부담이 커지게 된겁니다. 공납의 의무를 지우는 기준을 "토지"로 정한 겁니다. 토지의 소유 면적에 따라 공납에 해당하는 만큼 쌀을 납부하게 된 겁니다. 당연히 땅을 적게 소유한 농민이나 땅을 소유하지 않은 소작농들의 부담은 획기적으로 적어지고 땅을 많이 소유한 양반들의 부담이 커지게 된겁니다.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대신들 간에 엄청난 논란이 발생합니다. 꼭 얼마 전 종합부동산세 부과 때의 모습 그대로 말입니다. " 아니, 많이 가진게 죄야? "라는 이런 말 같지도 않은 골 때리는 논리가  당시에도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광해군은 우선적으로 경기도에서만 시범적으로 대동법을 시행하게 됩니다. 

 

두말하면 잔소리겠지만, 경기도 일원의 땅은 대부분 당시 권력 실세들의 땅이라 양반계층의 불만이 아주 높아졌겠죠.. 그렇습니다. 양반 지주 계층의 불만이 극에 달했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왠지 오버랩되는 분이 계시죠. 10여년 만에 공직에 복귀하자마자 세금 억울하게 많이 냈다고 이를 가시던 그 분..! 그 세금 없애지는 못했지만, 결국 반신불수로는 만들어 놨죠.  

 

우리나라와는 다르지만  과거 유럽 지역의 혁명 발생 원인을 보면, 가장 큰 이유가 거기서도 세금문제였습니다. 유럽 지역의 혁명은 귀족의 방탕한 생활과 평민들에게 부과되는 과도한 의무가 원인이 되어  왕정이 붕괴되는 과정의 반복이었던 겁니다. 미국의 독립도 따지고 보면, 본국(영국)의 과도한 징세가 그 원인이었던거 처럼 말입니다.

 

하여간  우리나라는 요상하게도  다른 나라의 역사들과 항상 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면에서 그럴까요? 광해군 때의 반정은 거꾸로 특권층의 세금 부담을 올리고 평민의 부담을 줄인 것이 원인이 된 겁니다.  최근에 본 정치적 사실도 이와 유사하지요! 세계사의 흐름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역사의 전개... 세금 부담 전혀 없던 상류층에 세금 부담 지웠다고 난리 치는 나라.... 이런 걸 보면, 참으로 한국적인 역사 전개라 할 수 있겠습니다....... ^^ ; (물론, 그 원인에는 항상 외세에 의존한 세력들만이 권력을 얻었다는 배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에는 대동법이 요즘과 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 인조 1년에 이 대동법은 오히려 강원도로 확장시행됩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해당지역을 확장하여, 결국 숙종 때에 이르러  함경도, 평안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하게까지 됩니다. 주류 세력인 양반들이 대동법 시행을 극렬하게 반대하기는 했지만 조정의 입장에서는 막상 시행을 해보니 이보다 효과적인 세제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대동법 시행에 반대 했던 인조 반정 세력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도 계속적으로 확대 시행 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여간 요즘 한국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냥 그 역사가 생각나네요.

 

왠지, 이런저런 모습들이 많이 겹쳐 보이지 않습니까?  나라의 경제위기, 한반도 주변의 외교문제, 부동산에 대한 세금 문제, 나라의 재정 문제 등등...

 

현 정부의 미국 의존 일변도 " 자칭 실용 외교" 가 이제 그 결과물들을 여기저기서 하나둘씩 보여주고 있는데요. 북한, 러시아, 중국, 리비아, 이란  ... 줄줄이 엮기는 외교적 실패의 원인은 전혀 실용적이지 못한 실용 외교 덕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한동안 실용 경제 외교의 정수라고  자화자찬에 난리를 치던, 중동 지역 원자력발전소 건설수주도 내막을 열어보니 속빈강정이고 ... (터키는 심지어 공짜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면서요... ^^;) 

 

외교적 교섭력으로 UN사무총장을 배출하고, 30개월 이상 소고기 수입을 거부하면서도 미국과 FTA를 유리한 조건으로 체결하는 수완을 보이며, 전세계적으로 고른 외교적 성과를 거두던 우리나라의 강한 외교가 지금과 같은 정도의 함양 미달의 아마추어적인 모습으로  퇴보한 이유는  현재 우리나라의 외교가 오직 국내용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일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외교는 국외용인데 현 정부는 외교를 국내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외교 정책의 혼란과 실책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외무부 장관이 국내 문제에만 이토록 관심이 많았던 정부가 이 전에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국내 문제에 말이 많고..)

 

에혀~~ 다음 번엔 무슨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 역사는 정말 미래의 거울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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