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임레 케르테스 저 ,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
-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이라고, 나는 누구도 대신 걸어가 줄 수 없는 나의 길을 걸었다. 그것도 단정한 태도로 걸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유일한 허물과 오점과 우연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가 지금 이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왜 내가 지금껏 걸어왔던 모든 단계들과 이 모든 단정한 태도들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를 깡그리 잊어버리기를 원하는 것일까? 어째서 갑작스레 이런 심경의 변화가, 어째서 이런 반항심이, 어째서 이런 불쾌감이 드는 것일까?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나는 점점 더 흥분하고 감정에 북받쳐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 289쪽 )
200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 "운명"은 헝가리 출신의 임레 케르테스의 작품이다. 그는 1944년 15살 때 헝가리에서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이다. 그는 운이 좋았는지 그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는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 나더러 승리자나 패배자가 되라고 한다든지, 원인과 결과가 되라고 한다든지, 잘못과 정의가 되라고 하는 것도 안 될 말이라고 했다. 그냥' 내 탓이 아니오 '라고 주장하는 이 씁쓰레한 어리석음을 나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해 달라고 거의 간청하다시피 말했다. ( 290쪽 )
그가 경험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 아픔이 너무 클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들을 잊고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잊거나 잊지 못 하거나에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단계 한 단계 이어져 온 그의 삶이고 운명이었다. 그 것은 이미 그의 삶에 한 부분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다루어질 수 없는 그 자신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 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직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 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면. ( 292쪽 )
학살의 역사는 우리의 뒷모습에서도 많이 찾을 수 있다. 광주, 한국전쟁, 일제징용자, 위안부, 간도학살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 우리다. 그러나 그 동안의 역사가 홀로코스트 당사자의 입장에서 조망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동안 그들에게 그냥 미래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잊기' 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그들이 잊든 기억하든 아파했든 그 속에서 행복을 느꼈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의 판단은 온전히 그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의 자유와 맞바꾼 그들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